1. 글에 대한 느낌
편한 글이라고도, 에세이라고도, 소설이나 철학책이라고도 분류하기 어려운 느낌이다. 어려운 듯하면서도 평이한 문체가 이어지는가 하면 갑자기 철학책의 한 가운데를 편 듯 탁 막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고기에 관한 소설을 기대하면서 폈던 책이었는데 실망이었다가 놀람이었다가 사색과 알 깨기를 가져다 준 책이 되었다.
2. 줄거리
이 책은 저자인 룰루밀러가 위대한 분류학자인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을 좇아 인생의 의미를 탐구하는 내용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지만 말 그대로이다. 룰루 밀러는 어릴 적 아버지의 영향을 깊게 받아 삶의 의미에 대한 결핍이 생겼다. 남에게 절대 피해를 입히지 않으며 자신의 원칙에 따라 성실하게 사는 듯하지만 아버지는 삶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깊은 곳을 들여다 볼수록 허무와 무의미함만 발견할 뿐이었다.
밀러는 대학교에 진학을 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평생을 함께할 것 같은 행복한 미래를 그려 나간다. 평온할 것 같은 그녀의 삶을 무너뜨린 것은 여행 중에 만난 한 여자이다. 이상한 감정에 휩쓸린 밀러는 동성의 여인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밀러의 고백을 들은 애인은 밀러를 떠나가게 된다. 그와의 행복했던 나날들, 그리고 평범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흔들리게 되면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것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이었다.
위대한 어류 분류학자로 지구상 대부분의 어류의 학명을 명명한 그는 현대 분류학의 아버지이자 명문대학 스탠포드의 초대 총장을 거친 인물이다. 고통에 빠진 사람은 수집벽을 통해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는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분류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보며 위로받고 공감대를 얻는다. 조던은 평생을 바쳐 수집한 물고기 샘플이 자연재해로 인해 모두 파괴될 처지에 처했을 때도 하나씩 줍고 다시 분류해나가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간다. 그런 모습을 보며 밀러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치유받는 감정을 키워나간다.
하지만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알아갈수록 새로운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는 우생학을 믿고 따르며 발전시키는 사람이었으며 자신을 압박하는 제인 스탠포드를 살해한 의혹이 있었다. 물고기를 분류하는 행위 자체가 우생학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우월하고 열등한 유전자를 분류하는 일이었으며 그가 평생을 우직히 노력해 온 근간은 인간의 성실함, 존엄성처럼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열등한 인간을 제거하려는 무서운 신념이었던 것이다.
3. 생각해 볼 부분
이 책에는 스포일러가 있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에 리뷰를 들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스포일러를 듣더라도 책을 읽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스포일러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하다고 한다. 바닷 속에 사는 생물들이 비슷하게 생겼는가? 물고기라는 엄청난 대분류 밑에 있는 생물들은 해부학적으로 아예 다른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유전적, 생물학적 특성이 매우 다양하다. 단지 사람이 분류하기 편하다는 이유로 '물고기'라는 대분류를 달고 있는 것이다. 그게 왜 문제가 되는가? 물고기 입장에서 문제가 된다! 물고기가 사실 사람과 같은 분류라면 물고기를 쉽게 먹을 수 있겠는가? 물고기 분류 속에 있는 생물 중에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한 종도 있다. '바다' 속에 있다는 이유로, 인간의 편의를 목적으로 물고기로 분류되고 있을 뿐.
조금만 확장시켜 생각해보면 사람의 편의를 위해 단순하게 분류되고 처리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밀러가 양성 모두에게 사랑의 감정, 유대감을 느끼는 것이 분류의 대상이 될 일인가? 이성애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정상이고 동성애자라서 사회적 모멸감을 느끼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애초에 인간의 편의를 목적으로 한 이성애자, 동성애자의 분류가 문제인 것이다. 그 분류의 근간이 우생학과 닿아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이다. 생각해보면 우생학이 다양한 이름의 탈을 쓰고 우리의 정신 깊이 침투해 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은 우리의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망치를 자처하고 있다. 망치가 여기 있으니 가져다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오라고. 차가운 우생학의 바다 속에서 빠져나와 따뜻한 인류애의 세상으로 나오라고.
'책과 영화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0) | 2023.01.08 |
---|---|
루리 작가의 <긴긴밤> (0) | 2023.01.07 |
유은실의 <순례주택> (2) | 2023.01.06 |
지방 소멸_마스다 히로야 (0) | 2021.06.06 |
10대를 위한 정의란 무엇인가_마이클 샌델 원저 (0) | 2021.05.09 |
댓글